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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기록, 몰입

제 2장 성산(城山)의 탄생

jeju09 | 2026년 02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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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과는 다르게 흘렀다.
파도가 천 번을 때려야 겨우 모래알 하나만 한 내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그것은 아주 느리고 집요한 고문이었다.


태초의 열기가 식어버린 내 차가운 몸뚱이 위로 제주의 바람은 보이지 않는 날카로운 사포가 되어 밤낮없이 나의 표면을 문질러댔다.


"스으극, 스으극..."


내 가장 바깥쪽 피부가 마모되는 소리. 나를 감옥처럼 가두었던 그 두꺼운 퇴적층의 결박이 수만 년의 풍화(風化)
앞에서 조금씩 헐거워지기 시작했다.


바닷물이 내 기공 깊숙이 침투해 소금 결정을 키워낼 때마다 내 안의 미세한 틈들이 벌어졌다.
나의 견고했던 모서리는 둥글어졌고, 나의 거대했던 육신은 조금씩 바다의 일부로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늙어가고 있었다. 비로소 유한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새벽이었다. 내 몸이 부서지는 고통에 익숙해질 무렵,


저 멀리 동쪽 바다 끝에서, 수평선이 찢어지는 굉음이 들려왔다.


"콰과광—!"


나는 보았다. 나의 아득한 옛 기억이 저기서 되풀이되는 것을. 시뻘건 마그마가 차가운 바다를 뚫고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바다는 다시 한번 거대한 수증기의 기둥을 토해냈고 검은 화산재가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나보다 훨씬 거대하고 웅장한 왕관이 바다 한가운데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나의 지친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저 갓 태어난 젊은 돌의 뜨거운 열기가 수십 킬로미터의 바다를 건너 내 식어버린 심장에 닿았다.


아, 너도 결국 나와 같은 운명이구나. 뜨거운 자유를 빼앗기고 차가운 형체에 갇힌 새로운 막내여.


나는 깎여나가며 너의 탄생을 축복한다. 너 또한 이 바람과 파도 앞에서 언젠가 나처럼 둥글게 늙어가리라.
그리하여 우리 모두, 결국 한 줌의 점으로 돌아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