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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기록, 몰입

제 4장 붉게 녹슨 구멍

jeju09 | 2026년 02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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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바뀌는 바람 냄새가 아니었다. 어느 날 밤, 대기를 찢으며 날아온 것은 날카로운 금속성의 진동.


"푸쉬웅 - 탕 탕 -"


내 몸에 부딪힌 것은 파도가 아니라, 뜨거운 납 탄환의 파편이었다.
수만 년을 버틴 내 견고한 표면이 처음으로 비명을 지르며 깨져나갔다.


그리고 이어진 무거운 침묵. 쫓기던 가쁜 숨소리들이 내 곁에서 차갑게 식어갈 때, 내 위로 엎어진 말랑한 느낌에 무엇인가 마지막 체온이 급격히 빠져나갈 때, 나는 열역학적인 절망을 느꼈다.
내가 가진 차가움이 그들의 생명을 더 빨리 앗아가는 것만 같아서.
가장 참혹한 것은 차갑고 억울함이 느껴지는 액체였다.


바닷물보다 뜨거운 붉은 액체가 내 기공(氣孔)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 속에 담긴 철분(Fe)이 내 몸속의 광물질과 만났을 때, 내 내부는 미친 듯이 반응하며 산화(酸化)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씻겨나가지 않는 슬픔의 문신이었다.
내 검은 심장이 붉게 녹슬어가는 화학적 통증. 억울하게 끊어진 생명 원자들의 기억이 내 입자 구조 사이에 끼어 영원히 빠지지 않는 녹이 되어버렸다.
나는 이 엄청난 내부 응력(Stress)을 견딜 수가 없어서 스스로 거미줄 같은 균열을 일으키며 소리 없이 울었다.
그러나, 나는 부서져서는 안 되었다. 차갑게 식어버린 이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는 더 단단하게 버티어 그들의 마지막 요람이 되어주는 것.


보아라, 내 몸에 뚫린 수천 개의 구멍들을. 이 비어있음은 이제 너희들의 피난처다.


갈 곳 잃은 영혼들이여, 저 바람을 피해 내 기공 속으로 숨어라. 채 다 하지 못한 너희의 억울한 이야기들을 내 깊은 구멍 속에 공명(共鳴)으로 가두어 영원히 기억하리라.


나는 제주의 가장 거친 수의(壽衣)가 되어 붉게 녹슨 가슴으로 너희를 덮는다. 부디 내 안에서,
가장 안전하고 무거운 잠을 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