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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기록, 몰입

제 5장 모래의 요람

jeju09 | 2026년 02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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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쉼 없이 내 등을 밀어댔다. 수천 년간 나를 옥죄던 그 붉은 녹과 비릿한 기억을 염분 가득한 파도가 들이치며 씻어내고 또 씻어냈다.
내 깊은 구멍 속에 박혀있던 슬픔의 파편들이 파도의 거친 연마(硏磨)질에 닳고 닳아 마침내 둥글어졌다.


"사르르, 사르르—"


이제 나는 더 이상 누군가를 다치게 하는 날카로운 모서리가 아니다.
수조 번의 충돌과 마찰 끝에 나를 부수어 가장 작고 부드러운 '모래알'로 다시 태어났다.
검은 현무암의 무게를 내려놓고 은빛 소금기와 섞여 해변의 드넓은 품이 되었다.
나의 몸 위로 이제는 총성이 아닌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내려앉는다.
맨발로 나를 밟는 이들의 온기가 내 모래 입자 사이사이로 스며들 때, 나는 비로소 내가 겪은 그 모든 열충격과 산화의 통증을 보상받는다.


뜨거운 여름날, 지친 이들이 내 위에 누워 잠을 청할 때 나는 그들의 하중을 수십만 개의 입자로 나누어 받으며 가장 낮은 곳에서 그들의 휴식을 지탱한다.
누군가의 눈물을 흡수하고, 다시 햇볕에 말려 보내며 나는 상처 입은 섬의 살갗을 덮는 거대한 반창고가 된다.


치유는 잊는 것이 아니라, 아픈 기억을 부드러운 촉감으로 바꾸어가는 일. 나는 이제 날 선 바위가 아니라, 모두를 품을 수 있는 너그러운 해변에 모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