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다는 쉼 없이 마지막까지 나를 붙들고 있던 모래알의 둥근 형체마저 파도에 씻겨 허물어진다.
억겁의 시간을 버텨온 나의 물리적 결속이 풀리는 순간, 나는 비로소 '돌'이라는 무거운 이름을 벗고 우주의 가장 가벼운 근원, 하나의 '점(입자)'으로 돌아간다.
이제 나는 고여있는 고체가 아니라, 흐르는 유체(流體)의 일부다. 뜨거운 태양이 제주 바다를 달굴 때 내 입자들은 수억 개의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날아오른다.
용머리 해안의 그 뜨거웠던 기억이 나를 밀어 올리고 바람을 타고 한라산 영실 기암 너머로 흘러가 검은 먹구름의 씨앗이 된다.
"후두둑—"
차가운 대기와 만나 다시 지상으로 낙하하는 비. 나는 곶자왈의 깊은 숨골 속으로 스며들어 어둡고 축축한 지하수의 강을 이룬다.
나의 광물질 뼈대에 새겨졌던 어린 숨비소리와 역사의 붉은 녹은 이제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미네랄이 되어 흐른다.
보라, 내가 돌이었을 때는 결코 닿을 수 없었던 곳들을. 나는 계곡을 타고 흘러 이름 모를 들꽃의 뿌리를 적시고, 목마른 노루의 목축임이 되고, 다시 바다로 흘러가 어린 물고기의 아가미를 통과하는 숨이 된다.
억지로 무언가를 만들려 하지 않아도(無爲) 저절로 그러한 자연의 거대한 순환.
돌이 부서져 흙이 되고, 물이 되고, 다시 생명이 되는 이 멈춤 없는 윤회의 고리 속에서 나는 비로소 영원히 살아있는 '흐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