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곧 출발하는 비행기에 서둘러 올랐다. 주말이라 그럴까. 제주행 비행기는 남는 자리 하나 없이 사람들로 꽉 차 있다. 활주로를 달리던 비행기가 이내 훌쩍 날아올랐다. 고요한 적막을 견딜 수 없다는 듯 날개에 붙은 엔진이 웅웅거린다. 도시를 떠나 제주에 머문지 15년. 그간의 시간들이 영화 필름처럼 한 장면씩 스쳐 지나간다.
SCENE #1 여행은 때론 도피다
때떄로 익숙한 일상과 번잡한 세상에서 숨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여행'이라는 그럴 듯한 이유로 모든 것들로부터 떠남을 시도한다. 나 또한 그랬던 것 같다. 비록 그 '여행'이 돌아올 기약이 없고, 도피처가 제주가 될 지는 몰랐지만. 2011년 11월. 배를 타고 건너온 세간살이들을 집 안 곳곳에 풀어놓고 나니 그제야 도시를 떠나 온 것이 실감났다. 처음 제주에 가겠다고 했을 때 주변 반응은 두 가지였다. 한 쪽은 "용기 있다!"며 박수를 친 반면, 누군가는 "너 미쳤구나!" 하며 뜯어 말렸다. 아무렴 어떠하리. 어쨌든 난 제주에 와 버렸는데.
SCENE #2 온더로드, 그 길 위에서
제주에서 우리는 지금껏 가보지 않았던 새로운 길을 가보기로 했다. '게스트하우스'가 한창 유행이던 때였다. 마치 신혼집을 꾸미듯 여행자들을 위한 아늑한 보금자리를 꾸몄다. 열 두개의 베드를 갖춘 아담한 공간이었다. 우리와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곳에서 우리는 또 다른 행복을 찾았다. 곰살맞은 아들과 어머니가 함께 올레길을 걸었고,독일에서 온 청년은 오름에 올라 연신 감탄사를 터트렸다. 간호사, 선생님, 피디 등 일에 지친 이들이 숲길을 걷고 바다를 바라보며 생생한 제주의 에너지를 받아갔다. 그들과 함께하며 우리도 도시에서 잃어버렸던 웃음을 다시 찾았다. 이곳, 제주에서.
SCENE #3 너희들은 어디에서 왔니?
하도리 철새 도래지. 이곳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건 해안도로를 달리는 차들 뿐 바다 위를 떠가는 배들도 느릿느릿하게 보인다. 하늘의 구름도 느릿하고 고요하다. 벤치에 앉아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하릴 없이 시간을 보낸다. 평화로움 그 자체다. 그런 순간이 있다. 모든 것이 그 순간을 위해 짜 맞춰진 것 같은. 햇빛과 공기와 숲과 나무와 새들 보이는 것 모두가 오로지 그 순간을 위해 존재하고 모든 블럭이 완벽히 들어맞는 레고 작품 같은. 계절이 바뀌고, 떠났던 철새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면서 그런 순간들이 몇 번이나 내게 찾아왔다. 감사한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SCENE #4 문제는 내 마음인걸
그래, 인생이 늘 직진하는 길만 있을리 없지. 때론 휘어진 곡선처럼 에둘러 가야하는 길도 있을 것이다. 부드럽게 물결치는 용눈이오름 능선처럼 말이다. 사람에 지쳐 떠나온 도시에서 또 다시 사람에 지쳐버리고 말았다. 사실 우리가 견뎌내야 하는 건 사람이 아닐텐데. 힘겨운 상황에서도 잃지 말아야 할 건, 결국 사람임을. 겨울 끝에 봄이 오고, 꽃이 피는 것처럼 어려운 시기를 지나왔을 때 곁에 남아 있는 이들이 없다면 그 계절은 얼마나 쓸쓸할 것인가. 문제는 내 마음에 있다는 걸 떠나와서 알았다.
SCENE #5 다시, 떠나야 할 때
2016년, 온더로드에 쌓인 추억들을 고이 간직한 채 게스트하우스를 정리했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수많은 일들을 겪었고, 또 수많은 경험을 얻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그 결과는 자신이 책임질 수 밖에 없다. 좋은 선택과 나쁜 선택이 따로 있지는 않지만 좋은 결과와 나쁜 결과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현명한 사람은 나쁜 결과라도 겸허히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어쩔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에. 길 위의 집에서 다시 떠날 꿈을 꾼다. 하지만 이번엔 '도피'가 아니다.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 또 다른 길을 찾아 떠나는 것이다.
SCENE #6 힘들 땐 다랑쉬오름을 올라
가다가 힘들면 잠시 멈춰 고개를 들어본다. 푸른 바다와 넓은 들녘이 힘을 내라며 격려해준다. 가파른 길이지만 한발 한발 쉬엄쉬엄 올라가다 보면 어느새 정상에 닿는다. 지그재그로 이어진 탐방로를 한굽이씩 돌때 마다 보이는 모습이 조금씩 달라진다. 살랑대는 바람에 마른 억새가 사락사락 소리를 내고 푸른 밭이 내려다보인다. 한겨울에도 한창 수확 중인 월동무 밭이 분주하다. 야트막한 오름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 사이로 비쳐드는 햇빛에 억새무리가 반짝반짝 빛난다. 웅장하게 솟은 다랑쉬오름을 바라보며 그를 닮아가는 꿈을 꾼다. 그래, 나도 언젠가는 다랑쉬오름처럼 당당한 모습으로 내 삶과 마주할 수 있겠지. 오르고, 오르고 또 오르다 보면.
SCENE #7 비켜갈 수 없는 세상의 진리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 이런 것일까.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암 선고에 한동안 제주를 떠나 있었다.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진리는 딱 하나다. 누구나 언젠가 죽는다는 것. 그럼에도 가까운 이들의 죽음 앞에선 누구나 속수무책이 된다. 한 달에 두 세 번씩 서울과 제주를 오가는 그 길은 더 없이 길었다. 마음은 이미 컴컴한 공간에 갇혀 버렸다. 남몰래 흘렸던 눈물은 검은 강물이 되어 흘렀고 바닥도 보이지 않는 심연 속에서 한참을 허우적댔다. 아버지의 남은 생에 나는 어떤 딸이었을까.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돌아오는 길은 알 수 없는 죄책감과 후회로 발걸음이 무거웠다.
SCENE #8 내 영혼의 안식처 비자나무숲
한동안 아버지를 떠올릴 때마다 금세라도 비어져나올 것 같은 울음을 틀어막고 속으로 꺽꺽댔다. 언제까지 이 슬픔에 갇혀 출구도 없는 미로를 헤매게될까. 터벅터벅 비자나무 숲길을 걸었다. 나를 처음 제주로 불러들인 숲이었다.
숲에 첫 발을 들였을 때 나뭇가지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눈이 부셔 이마가 찡그려졌지만 한껏 구겨져 있던 마음은 되려 펴지고 있었다. 숲은 여전히 푸르고 싱그러웠다. 그리고 바람결을 타고 날아온 향기. 박하사탕을 으깬 것 같은 달큰하고 화한 내음이 흘러나왔다. 들숨을 타고 들어온 향이 온몸 구석구석 훑고 다니다 날숨에 빠져나오기를 수 차례. 톡 쏘는 기운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퍼져나가고 있었다. 영혼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나를 우울하게 만들던 것들은 사라지고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날 내 마음은 고요한 호수처럼 더없이 잔잔하고 평안했다.
SCENE #9 여행자의 밤
밤바다에 환하게 불을 켠 고깃배들이 바다를 비추고 하늘을 밝힌다. 수평선에 점점이 불을 밝힌 어선들이 별빛처럼 반짝이고 항구에 세워진 등대가 번쩍이며 이에 화답한다. 길 잃은 이들에게 희망을 내어주는 등대 불빛은 삶이라는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우리에게도 한 줌 빛이 되어 준다. 길잃은 자들이여, 나를 따라 오라. 마치 그렇게 외치는 듯 하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 본 밤하늘엔 구름 속에서 보름달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달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하고 아름다웠다. 얼룩진 달의 표면까지 다 보이는 듯 했으니까. 수많은 여행의 날들, 끝나지 않은 수많은 밤. 그 밤이 지나 가고 있었다.
에필로그.
어느새 잠이 들었던 걸까. 창가에 기댄 채 눈을 떴을 땐 구름 사이를 뚫고 비행기가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다. 흰 구름밭 아래 푸르게 펼쳐진 바다를 보며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이 마음에 제주를 품고 있구나. 여행과 로컬, 그 사이 어디쯤에 있는 제주. 시도때도 없이 불어오는 바람과 데일 것 같은 뙤약볕이 수시로 오가는 곳이지만 우리 인생도 그러하지 않는가. 기쁘고, 슬프고, 신나고, 두려운 온갖 감정의 파노라마가 몰아치는 버라이어티한 쇼의 연속. 이제 곧 집으로 간다. 나를 품어주는 곳, 내 아늑한 쉼터, 내 마음의 안식처 제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