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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기록, 몰입

1.틈이 있어서 견디는 것들

jeju03 | 2026년 02월 08일

틈이 있어서 견디는 것들


제주 돌담이 알려준 인생




프롤로그


제주 돌담은 완벽하지 않다.
돌과 돌 사이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처음엔 부실해 보였다.


하지만 그 틈 때문에 천 년을 버텼다.
바람을 막는 게 아니라 걸러냈기 때문에.


나도 그랬다.
구멍 난 채로 여기까지 왔다.




1장. 1997년, 멈춰버린 시계


왜 엄마는 안 오는 걸까?


8살 소년은 할머니 댁 마루에 앉아 있었다. 마룻바닥이 차가웠다. 발바닥으로 냉기가 올라왔다.


창밖 마당에 돌담이 서 있었다. 검은 현무암이 달빛을 받아 은색으로 빛났다. 바람이 불었다. 거센 제주 바람이 돌담을 때렸지만, 돌담은 꿈쩍하지 않았다.



"저 돌담처럼 나도 버틸 수 있을까?"



소년은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감쌌다. 어둠 속에서 숨소리만 들렸다. 시계가 째깍거렸지만, 시간은 멈춘 것 같았다.


첫 번째 만남


다음 날 아침, 소년은 학교를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할머니가 알려준 길을 따라 걸었다.


"저 돌담 따라 쭉 가면 학교야."


돌담이 끝없이 이어졌다. 현무암 돌들이 불규칙하게 쌓여 있었다. 어떤 돌은 크고, 어떤 돌은 작았다.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왜 구멍이 있지?"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대답도 없었다.




2장. 바람을 거르는 방패


첫 번째 깨달음


그날 오후,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소년의 몸이 휘청거렸다. 가방이 무거웠다.


바람이 더 세게 불었다. 소년은 돌담 쪽으로 몸을 기울여 등을 댔다. 차가웠지만 바람이 약해졌다.


바람이 돌담에 부딪혔다. 돌담을 넘지 못했다. 틈 사이로 빠져나갔다.


쉬이익—


낮고 부드러운 소리였다. 거센 바람이 작은 바람으로 바뀌었다.


숨을 쉴 수 있었다.


매일의 돌담


그날 이후, 매일 돌담 옆을 걸었다.


해가 따가운 날엔 돌담 그늘에 섰다. 완전히 막지는 않고 틈 사이로 햇살이 새어 들어왔다. 뜨겁지 않고 따뜻했다.
홑담


비 오는 날엔 돌담에 몸을 붙였다. 비가 돌담에 부딪히고 일부는 틈으로 빠져나가고 일부는 표면을 타고 흘러내렸다. 젖었지만, 덜 젖었다.


"고마워."


소년은 돌담에게 말했다. 아무도 듣지 않았지만 괜찮았다. 돌담이 듣는 것 같았다.


밤의 깨달음


그날 밤, 소년은 이불 속에서 생각했다.



"돌담은 벽이 아니야. 바람을 막는 게 아니라 거르는 거야."



바람을 완전히 막으면 돌담이 무너진다. 틈을 두면 바람이 지나간다. 돌담도 살고, 사람도 산다.


"내 마음도 그래야 하나?"


엄마가 없는 외로움. 아빠가 없는 허전함. 친구들이 없는 두려움.


그걸 꽉 막으려 하면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돌담처럼 틈을 두면, 조금씩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창밖에서 바람이 돌담을 지났다.


쉬이익—


바람 소리가 마치 나를 안정시키는것 같았다.




3장. 틈이 내어준 자리


30년 후의 돌담


돌담을 떠나며 뒤를 돌아봤다. 돌담이 여전히 서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틈 사이로 바람이 빠져나갔다.


쉬이익—


그 소리를 기억한다. 8살 때도 이 소리를 들었다. 30대가 된 지금도 이 소리를 듣는다.


"변하지 않았네."


소년은 변했지만, 돌담은 그대로였다.


할머니의 손


가까이 다가가 돌담을 다시 만졌다. 손바닥에 거친 감촉이 전해졌다.


문득 할머니 생각이 났다. 할머니의 손등도 이렇게 거칠었다. 평생 밭일로 거칠어진 손. 하지만 그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을 때,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웠다.


돌담도 마찬가지였다. 겉은 거칠지만, 그 거칠음이 나를 지켰다.


틈 사이의 생명


틈 사이를 들여다봤다. 작은 이끼가 끼어 있었다. 연두색 이끼. 돌 틈에서 자라난 작은 생명.


"여기서 살고 있구나."


그때 깨달았다.


구멍이라고 생각했던 틈이, 사실은 생명이 자라나는 화분이었다는 걸.
상처라고 생각했던 구멍이, 사실은 누군가를 품을 수 있는 자리였다는 걸.




에필로그


제주 돌담은 시멘트로 꽉 채우지 않는다.
돌과 돌 사이에 구멍을 둔다.
바람을 흘려보내기 위해서.


완벽해 보이려 애쓰지 않는다.
적당한 빈틈을 둔다.
그래서 거센 바람을 견딘다.




IMF가 왔을 때, 나는 무너질 것 같았다.
부모님이 떠났을 때, 나는 구멍 난 것 같았다.
혼자 남았을 때, 나는 불완전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 구멍이 나를 지켰다.
슬픔이 틈으로 빠져나갔다.
외로움이 틈으로 흩어졌다.
햇살이 틈으로 들어왔다.


꽉 막힌 벽이었다면, 나는 버티지 못했을 거다.




이제 나는 안다.
나를 단단하게 만든 것은 세상을 향해 세운 벽이 아니라,
아픔을 흘려보냈던 돌담의 틈이었다는 걸.


나의 틈은 이제 누군가를 받아줄 자리가 되었다.



누가 내게 올까?
어떤 바람이 내 틈을 지나갈까?
나는 누구를 지켜줄 수 있을까?



대답은 아직 모른다.
하지만 두렵지 않다.


그래도 여기까지 와버렸으니까.


창밖에서 구름이 움직였다.
나도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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