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1997년, 제주로
1997년 11월.
IMF가 터졌다.
아빠의 사업이 무너졌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사라졌다. 집도, 차도, 안정도.
집 안 대부분의 물건에는 빨간 딱지가 붙어있었다.
어린 쌍둥이 둘은 전혀 몰랐다. IMF가 뭔지, 그리고 부모님과 떨어질지…
갑자기 도망가듯이 비행기에 올라서 향한 곳은 "제주도"
어머니는 비행기에서 나의 손을 잡고 울며 말했다.
"이제 할머니 집으로 갈 거야. 엄마 아빠 잠깐 없어도 잘 기다릴 수 있지?"
나는 어머니가 그렇게 슬프게 우는 모습을 처음 봤다.
차마 이유를 물어볼 수 없었다.
8살 나이에 찾아온 첫 시련이었다.
제주공항을 거쳐 배를 타고 간 가파도.
바람이 불었다. 서울과는 다른 바람이었다. 짠내가 났다.
할머니가 손을 내밀었다. 거칠었다. 하지만 따뜻했다. 꼭 잡았다.
"여기가 네 집이야."
할머니 댁은 작았다. 돌담이 마당을 둘러싸고 있었다. 검은 현무암 돌들.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이었다.
틈이 숭숭 뚫려 있었다.
"왜 구멍이 있어요?"
할머니가 웃었다.
"바람이 지나가야 안 무너져."
그날 밤, 마룻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웠다. 차가웠다. 발바닥으로 냉기가 올라왔다. 서울 아파트가 그리웠다. 엄마가 그리웠다.
언제 올까? 내일? 모레?
창밖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다. 돌담을 지나는 바람. 낯설었지만, 무섭지 않았다.
쉬이익—
그렇게 제주에서의 첫 밤이 지났다.
아침이 왔다. 학교에 가야 했다. 혼자 가야 했다.
"저 돌담 따라 쭉 가면 학교야."
할머니가 알려줬다.
걸었다. 돌담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마을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왜 이렇게 길어?"
여기가 처음인 쌍둥이 동생이 알 리가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다. 여전히 혼자였다. 부모님은 서울에서 일했다.
가끔 전화가 왔다.
"잘 지내지?"
"네."
"곧 갈게."
오지 않았다. 괜찮았다. 제주가 키웠다.
우울할 때는 바다로 갔다. 신촌바다. 현무암 바위가 해안을 채운 곳. 모래는 없었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혔다. 밀려왔다가 돌아갔다.
철썩—
바다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날 달랬다.
중학생이 되자 아빠가 내려왔다.
엄마도 곧 오겠지. 아버지는 살이 찐 나를 운동시켰다.
"오름 가자."
가기 싫었다. 하지만 따라갔다.
숨이 찼다. 다리가 무거웠다.
"조금만 더."
올라갔다. 정상에서 제주 전체가 보였다.
후—
처음 본 풍경이었다.
이제 30대가 되었다. 서울에서 일한다. 가끔 제주로 돌아간다.
돌담은 여전히 거기 있다. 바다도 그대로다. 오름도 변하지 않았다.
나는 달라졌다.
8살 때는 몰랐다. 제주가 무엇을 가르쳐주는지.
이제 안다.
돌담은 완벽하지 않아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바다는 밀려와도 반드시 돌아간다는 것을.
오름은 높이 올라야 전체가 보인다는 것을.
이것이 내가 제주에서 배운 생존의 언어다.
이 책은 그 이야기다.
변하지 않는 제주와 변해버린 나의 이야기.
8살 소년이 30대 어른이 되기까지의 이야기.
상처받은 아이가 제주 자연에게서 배운 3가지 지혜의 이야기.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