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밀려와도 돌아가는 것들
신촌바다가 알려준 순환
프롤로그
바다는 약속을 지킨다. 밀려온 파도는 반드시 돌아간다. 아무리 높이 차올라도.
처음엔 영원할 것 같았다. 하지만 썰물이 왔다.
슬픔도 그랬다. 밀려와도 돌아갔다.
1장. 갈 곳이 없을 때
목요일 오후
초등학교 6학년, 어느 목요일이었다. 학교가 끝났다. 집에 가기 싫었다. 작은 어머니 댁도 가기 싫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걷기 시작했다. 방향을 정하지 않았지만,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30분을 걸었다. 바다 냄새가 났다. 짠내가 코끝을 스쳤다.
신촌바다
현무암 바위들이 해안가를 채우고 있었다. 모래는 없었다. 검은 바위뿐이었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혔다. 물이 하얗게 튀었다. 다시 밀려갔다.
철썩—
큰 바위 하나에 주저앉았다. 차가웠다. 단단했다. 엉덩이로 냉기가 전해졌다.
"여기가 좋네."
첫 번째 대화
바다를 바라봤다. 수평선이 끝없이 이어졌다. 회색 하늘과 회색 바다가 만났다.
파도가 또 왔다. 바위에 부딪혔다. 밀려갔다. 반복이었다.
혼잣말이 나왔다.
"힘들어."
바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파도만 왔다 갔다.
철썩—
"너무 힘들어."
바다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런데도 괜찮았다.
2장. 바다는 말이 없었다
묻지 않는 친구
일주일 후, 또 우울했다. 또 신촌바다로 갔다.
같은 바위에 앉았다. 바다를 봤다. 파도를 봤다.
바다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왜 왔어?" "무슨 일 있어?" "괜찮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거기 있었다.
철썩—
파도만 왔다 갔다.
루틴이 되다
그 후로도 갔다. 우울할 때마다.
시험 망쳤을 때. 친구랑 싸웠을 때. 이유 없이 슬플 때.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
신촌바다로 갔다.
몇 번 갔는지 세지 않았다. 10번? 20번? 중요하지 않았다.
필요할 때 갔다. 그뿐이었다.
변하지 않는 것
내 삶은 계속 변했다.
학년이 올라갔다. 친구가 바뀌었다. 고민이 달라졌다.
하지만 바다는 그대로였다.
파도는 똑같이 왔다. 바위는 똑같이 차가웠다. 수평선은 똑같이 멀었다.
철썩—
그게 위로였다.
"변하지 않는 것. 그게 위로였다."
내가 변해도 바다는 그대로였다. 내가 흔들려도 바다는 흔들리지 않았다.
3장. 밀물은 썰물로 돌아간다
30대, 다시 신촌바다
렌터카를 몰고 신촌바다로 갔다. 10년 만이었다.
주차하고 내렸다. 바다가 보였다. 그 바위를 찾았다. 중고등학교 때 앉던 바위.
있었다. 똑같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여전히 차갑고 단단했다.
다른 감각
파도를 봤다. 왔다. 부딪혔다. 밀려갔다.
똑같았다. 하지만 느낌은 달랐다.
예전엔 위로받으러 왔다. 지금은 감사하러 왔다.
"그때 고마웠어."
혼잣말이 나왔다.
"말없이 있어줘서." "변하지 않아서."
철썩—
바다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웃음이 났다.
밀물과 썰물
파도를 자세히 봤다.
밀려왔다. 바위를 덮었다. 높이 차올랐다.
잠시 후, 밀려갔다. 바위가 드러났다. 낮아졌다.
또 밀려왔다. 또 밀려갔다.
"밀물과 썰물."
중얼거렸다.
"슬픔도 저렇구나."
밀려와도 돌아간다. 아무리 높이 차올라도 반드시 빠진다.
감사
핸드폰을 꺼냈다. 바다를 찍었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히는 순간. 셔터를 눌렀다.
사진을 봤다. 물이 하얗게 튀는 순간이 담겼다.
"다음에 우울하면 이 사진을 보면 되겠다."
사진만으론 부족하겠지. 바람 소리는 담기지 않았다. 바위의 차가움도. 파도의 리듬도.
하지만 괜찮다. 기억하면 된다.
에필로그
바다는 약속을 지킨다. 밀려온 것은 반드시 돌아간다. 예외는 없다.
밀물이 와도 썰물이 온다. 만조가 와도 간조가 온다. 영원한 밀물은 없다.
중학교 2학년, 갈 곳이 없었다. 고등학교 때, 우울이 밀려왔다. 입시 스트레스, 진로 고민이 차올랐다.
하지만 다 지나갔다. 밀물처럼 왔다가 썰물처럼 갔다. 바다가 가르쳐준 순환이었다.
신촌바다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날 달랬다.
이제 나는 안다. 감정도 조수처럼 움직인다는 걸. 밀려와도 반드시 돌아간다는 걸.
슬픔이 밀려올 때, 나는 기억한다. 신촌바다의 바위에 앉아 본 그 순환을.
철썩—
갈 곳이 없을 때, 바다로 갔다. 바다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날 달랬다. 밀려와도 돌아가는 것들을 보여줬다.
10년 후 다시 왔다. 바다는 그대로였다. 나는 달랐다.
이제 우울이 와도 안다. 이것도 지나간다는 걸.
밀물은 썰물로 돌아간다.
바다가 약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