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내린 제주는 여전히 푸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공항에 도착하자 훅 몰려드는 그 특유의 냄새. 낮게 깔린 건물들 너머로 보이는 바다와, 돌담 사이로 비집고 나온 초록빛들을 보면 무뎠던 감각이 비로소 제 자리를 찾는 기분이다. 이게 그냥 제주라서 좋은 건지, 아니면 여기서 가장 뜨거웠던 내 이십 대의 기억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건, 나에게 제주는 '관광지'가 아니라 그냥 내 '일상의 색깔'이었다는 사실이다.
비자림을 걷다 보면 돌 위에 어떻게든 뿌리를 박고 서 있는 나무들이 보인다. 육지의 숲이 주어진 흙의 너그러움에 기대어 평온하게 번져간다면, 제주의 초록은 거친 화산암의 틈을 기어이 비집고 나와 스스로 자리를 만든 집요한 의지에 가깝다. 겨울에도 코끝을 스치던 그 시원한 흙 내음. 그 냄새를 매일 맡으며 살던 시절의 나는, 여행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벽한 원주민도 아닌 그 묘한 경계에 서 있었다. 그 애매한 위치가 관광 지도에는 나오지 않는 무 밭의 꽃망울이나 퇴근길 바닷가에서 마주하는 동백 나무들을 만나게 해 주었다.
서울에서의 삶은 가끔 내가 무채색 기계가 된 것 같은 착각을 준다. 지하철 인파를 피하려고 30분 일찍 서둘러도 돌아오는 것은 삭막한 사무실 뿐이다. 자연을 만나기 위해 시간을 내어 먼 길을 떠나야 하고, 그 길에서 또다시 사람과 차에 치여 에너지를 소진하는 아이러니.
제주 살 때의 출근길은 달랐다. 똑같이 30분 일찍 나섰지만 그 시간은 목적지를 향한 질주가 아닌 영감을 수집하는 탐색이었다. 마을 오솔길로 접어들면 계절마다 색을 달리하는 무 밭과 브로콜리 밭이 나를 맞이했다. 하얀 무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거나 짙은 초록색 브로콜리가, 노란 브로콜리 꽃이 올망졸망 자리 잡은 그 사이를 느릿느릿 달리는 드라이브. 퇴근길엔 금세 닿는 바닷가에 차를 세워두고 노을을 보던 날들.
당시의 나는 화려한 여행객들 사이에 섞여 있다가도 다음 날이면 다시 일상복을 입고 출근하는 일상과 휴식의 경계가 없는 삶을 살았다. 흔히들 워라밸을 말하며 일과 삶을 분리하려 애쓰지만 제주에서의 나는 일 속에서 영감을 얻고 휴식 속에서 다음 일의 힌트를 찾았다.
도시의 하늘은 고개를 일부러 돌려야 보이지만, 제주의 하늘은 그저 눈만 뜨면 거기 있었다. 사람에 치이는 건 어딜 가나 비슷할지 몰라도, 자연이 얼마나 가까이 있느냐에 따라 삶의 온도는 확연히 달라진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제주는 나에게 단순히 풍경이 예쁜 장소가 아니었다. 일상 속에 자연의 색이 스며들어 있고 하늘을 보는 게 노력이 아니라 당연함이었던 삶의 방식이었다. 제주는 찾아가야 할 목적지가 아니라 내 안에 흐르고 있는 하나의 호흡이었다. 비자림의 나무들처럼 나도 저 무채색 도시 어딘가에 나만의 푸른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