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자림은 제주에서의 첫 여행 중에 방문했다가 한눈에 마음을 빼앗긴 숲이다. 제주 동쪽, 저 멀리 오름의 완만한 능선이 보이는 동네에 자리하고 있어, 가까워지는 풍경부터 먼저 마음을 연다. 나무가 빼곡히 들어선 비자림로를 따라가다보면 기대감이 더해진다.
입구를 지나 잘 정돈된 정원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서면 붉은 화산송이로 덮인 길이 나타난다. 짙은 붉은 빛의 화산송이는 초록의 나무들과 선명하게 대비되어 강하게 기억에 남는다. 자박자박 발을 옮길 때마다 나는 소리에 정말 비자림에 왔구나 싶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화산송이와 돌, 돌 위에 자라난 이끼, 고사리와 덩굴식물, 그리고 수없이 많은 나무가 함께 어우러진 풍경이 펼쳐진다. 시선이 어디에 닿든 자연스럽게 머문다. 고개를 들면 초록 잎들이 겹겹이 쌓여 하늘을 가리고, 그 사이로 햇빛이 간지럽히듯 떨어진다. 일본어에는 이 모습을 가리키는 ‘코모레비’라는 단어가 있다. 한글로 써본다면 ‘잎새 윤슬’ 이라 하면 어떨까.
숲의 초입부터 비자나무가 보이면 바닥에 떨어진 가지를 찾는다. 끝에 달린 잎들을 톡톡 떼어 손가락으로 뭉개듯 문지르면 비자 향이 번지며 손 가득 묻어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향이다. 손을 킁킁대며 계속 걸어간다.
걷다가 수시로 멈춰 나무를 올려다본다. 굵고 곧게 자란 나무들 옆에 서 있으면 단단함과 굳건함을 조금은 닮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몇백 년을 이 자리에 서 있었을 시간을 떠올리다 보면 저절로 기도를 하게 된다.
길을 따라 걷고, 잠시 멈추고, 다시 걷는다. 이 단순한 반복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기분이 든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 멀리서 들리는 새 소리, 그리고 내 발소리. 이 소리들이 겹칠수록 생각도 자연스럽게 단순해진다. 어지럽게 얽혀 있던 생각이 해결되지도,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않았는데, 묘하게 괜찮아진다. 비자림은 그렇게 올 때마다 다시 걷고 싶어지는 숲으로 마음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