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년, 나는 제주에 처음 여행을 왔었다. 여행도 처음, 제주도 처음이어서 모든 것이 새로웠고, 있는 그대로 나에게 다가왔다. 몇 군데 게스트 하우스에서 머무는 동안, 제주에 처음 왔다고 말하면 호스트와 다른 게스트들은 저마다의 여행 팁을 아낌없이 건넸다. 운전을 하지 못해 뚜벅이로 다니던 나에게 가장 난감한 날은 비 오는 날이었다. 그 얘기를 꺼내면 사람들은 하나같이 꽤나 단호하게 말했다. “비 오는 날엔 숲이죠.” 비 오는 날 숲이라니. 진흙탕을 걷는 일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비에 젖은 신발과 축축한 바지자락을 떠올리며 흘려들었다. 그러나 이후, 비오는 날 비자림을 걷고 나서야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며 뒤늦은 공감을 하게 되었다.
곶자왈을 처음 찾았던 날에는 생전 처음 겪을 정도의 폭우가 쏟아졌다. 주차장에서 비가 그치기를 20분 넘게 기다리다가 결국 발길을 돌려야 했다. 제주에서는 자연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깨닫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그날이 그랬다.
그래서 다시 찾은 곶자왈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기대를 품고 숲으로 들어섰다. 물기를 머금은 숲에 들어서면 후각이 충만해진다. 비 오는 날 숲에 가야 하는 이유이다. 흙과 나무, 풀과 이끼에서 올라오는 향기는 나에게 이로움만 가득할 것 같다. 게다가 빗방울이 내 우산과 숲의 어딘가에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저절로 명상에 가까운 상태가 된다. 눈과 코, 귀가 모두 편안해진 채로 자박자박 숲길을 걷다 보면 붕 떠 있던 호흡이 땅으로 가까워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늘도 이곳에서 행복하겠구나 확신하며 초록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숲 해설과 함께 걷기 시작했다. 이런 종류의 ‘탐구 생활’을 유난히 좋아하는 편이라, 눈을 반짝이며 해설사 선생님을 바짝 따라갔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자연 속으로 들어온 한 개인이 이 숲을 정돈하면서 정착하게 되었고, 그의 가족도 함께 하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는 이야기. 한 개인의 삶에서 시작된 움직임이 문화가 된 공간을 마주할 때면 마음이 움직인다.
곶자왈은 제주 말이다. 풀어서 얘기하면 가시덤불 숲이라 할 수 있다. 나무가 자라 울창해져 숲이 되면 햇빛을 가리게 되어 가시덤불이 죽는다. 그러면 사람들이 들어와 나무를 베어 가고 그 자리에 다시 햇빛이 풍성해져서 가시덤불이 자란다. 그렇게 사람들이 들어오기 어려워지면 또다시 나무가 자라서 숲이 풍성해진다. 그렇게 곶이었다 자왈이었다 반복되는 환경이 곶자왈이다. 제주 사람들은 주어진 자연 그대로 숲의 생태와 섭리를 따라 살았겠구나 싶었다. 자연과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살던 시절의 사람들은 쉽게 불행하진 않았을 거 같다.
돌과 나무 위로 반질반질 동글동글 덩굴 식물이 귀여워서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 들여다보니 콩짜개덩굴이라고 한다. 콩을 반으로 쪼갠 모습과 닮아 붙은 이름이라는 설명에, 숲이 품고 있는 이야기가 재미있고 아름다워서 저절로 웃음이 번진다. 숲에는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식물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걷다 보면 함몰된 땅의 돌들 사이, 숨골이라 불리는 공간을 만난다. 먹이가 풍부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해 예전에는 마을의 공동 목장으로 동물을 키우던 곳이기도 했다. 물과 공기가 드나드는 틈, 나무와 내가 서있는 땅이 숨을 쉬고 있다. 그래서 제주에서는 숨쉬기가 더 편한 걸까. 나무뿌리 옆, 돌과 돌 사이 공간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며 숲의 향기를 흠뻑 들이마셨다.
또 한 나무 앞에 멈춘다. 등나무와 그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칡덩굴. 이 둘이 얽힌 모습을 묘사한 표현이 ‘갈등’이라는 설명이 이어진다. 서로 얽힌 틈 사이로 또 다른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자연도 사람 사이에도 틈이 필요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가 흔들리며 햇빛이 반짝거렸다. 높은 곳의 나뭇잎들이 샤랏샤라락 움직이면, 나무 아래 땅에는 잎 사이로 햇빛이 자지러지는 모양이 그려진다. 이 반짝거림은 언제 봐도 황홀하기에 어느새 맑아진 하늘에 감사했다. 비 온 뒤 갠 날씨에 숲을 걷는다는 것은 향기에 취하고 햇빛에 감동하는 일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알게 된다. 변화의 과정에는 늘 여러 얼굴이 나타난다.
이렇게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도록 곁을 내어준 숲에 고마운 마음이 인다. 행복한 마음이 조금 더 부풀어 오른다.
이번에도 역시 좋았다.
좋은 곳은 여러 번 봐도 좋다.
다음에 또 와야지.
※ 환상 숲 곶자왈 현장 해설을 바탕으로 내용을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