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 기회가 되어 제주[기록]몰입 이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속에서는 나를 소개할 시간이 종종 있었다. 그럴 때마다 “제주에 온 지 한 달 되었어요. 이것저것 시도해 보려고 왔어요.”라고는 했지만 어쩐지 찜찜했다. 여러 이유 중에 머릿속에서 사실 여부를 확인하느라 얼버무렸던 것 같다. 나는 정말 왜 온 걸까. 무엇을 바라고. 이 마음의 불씨는 작년 5월 말에 피어올랐다.
잠수교 북단에 있는 자전거 라이더들의 성지라는 ‘제1 보급소’라는 카페. 활짝 열린 문 너머로는 달리는 사람들과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지나갔다. 입고 간 니트가 덥게 느껴졌지만 팔을 걷어붙이고 살짝살짝 불어오는 살랑한 바람을 맞으니 얼추 적당한 온도로 유지되는 날씨였다. 그때 남편이 화두를 던졌다. 제주도로 가자! 퇴사하자! 고. 하필 상큼 달달한 음료를 연신 쪼록 들이켤 때였다. 남편이 불러온 날갯짓에 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단독주택에서 도란도란 같이 요리도 하고, 글도 쓰고, 책도 내고, 제주 곳곳을 다니며 사진이랑 영상도 찍는다. 바다에서 수영도 하고 서핑도 하고 스노클링도 한다. 그걸 콘텐츠로 만들어 크리에이터가 되는 삶, 그림을 그려 돈을 벌고 예쁜 카페를 돌아다니며 어디든 작업실이 되는 삶. 그렇게 나는 남편이 일으킨 제주 바람에 3일 만에 퇴사를 고백했다.
점심 먹고 다들 쉬고 있는 시간이었다. 남편에게 “나 가본다!”라며 카톡을 남겨놓고 쿵쿵대는 심장 소리를 애써 숨기고 심호흡을 하고 팀장님께로 다가갔다. “저.. 팀장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잠시 이야기 가능할까요?” 당황한 듯했지만 함께 회의실로 함께 올라갔다. 제주도로 간다는 말과 함께 한 달쯤 뒤에 퇴사하고 싶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드디어 제주로 왔다. 처음 맞닥뜨린 제주는 아주 맑았다. 아니, 더웠다. 12월 중순이었는데 맨투맨도 아닌 셔츠 하나만 입어도 될 정도였다. 잔뜩 긴장된 마음이 한결 녹아내리는 듯했다.
이사 오고 한 달이 흘렀다. 제주에 오면 매일 노을을 보고 오름을 오르고 해안길을 달릴 줄 알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돈 아끼려 탑차 하나에 실어 오겠다고 세탁기, 냉장고, 침대 등 큰 가구들은 거의 팔아버렸고, 도착해서도 부족한 살림을 메우려 하루 종일 ‘당근’ 알람을 챙겨보기에 바빴다. 거의 매일 집에만 있게 되고 그나마 나가더라도 지출을 줄여보려 찾아 들어간 곳은 늘 가던 프랜차이즈 카페였다. 제주를 둘러볼 여유조차 없었다. 그러다 보니 제주에 왔지만 우리가 꿈꾸던 환경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처음엔 햇살이 잘 드는 남향집, 분리된 부엌, 우리만의 작업실이 생겨 좋았지만 일주일, 한 달을 같은 공간에 있으니 점점 무뎌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가끔 예쁜 카페에 가거나, 오름을 오르거나, 여행객들이 많은 관광지에 가게 될 테면 어쩐지 가까운 곳에 이런 풍경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신기했다. 처음으로 한담해안길을 달리던 때에도, 집 근처 버거킹까지 달리던 때에도 주렁주렁 달린 귤나무, 저 멀리 보이는 한라산과 바다, 삐죽삐죽한 야자수, 걸리는 거 없이 펼쳐진 수평선과 지평선에 눈이 다 시원해졌다.

제주나 서울이나 삶의 모양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집에 나와 습습하고 깨끗한 제주 바람을 맞는 순간, 탁 트인 풍경을 마주한 순간, 그런 순간들이 나를 멈춰 세우고 환기했다. 서울 집값이 부담스러워서, 전원주택에서 마음껏 노래 듣고 영화 보고 싶어서, 제주 일상을 기록하는 크리에이터로 살고 싶어서, 같은 여러 이유가 있을 테다. 하지만 결국 내가 제주에 온 가장 큰 이유는 나를 멈춰 세우는 이 순간, 이 자연을 원 없이 마주하고 기록하기 위해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