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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기록, 몰입

밭담 앞에 선 우리

jeju18 | 2026년 02월 08일

제주에서의 이른아침, 그 골목을 거닐기 시작할 때는 생각보다 눈앞이 흐린 상태였고, 여러가지 복합적인 감정들로 힘이 들어 고개는 땅바닥만을 바라본 채 걷고 있었다. 고개를 잠시 들 때마다 보이는 건 파란 하늘 밑의 밭담들이었다. 제주의 하늘은 흰색의 파도를 부드럽게 내뿜는 푸른 바다 같았고, 그 아래에는 돌담에 둘러싸인 초록빛의 내음들이 가득했다. 잠깐 마주한 성벽 안의 푸르른 숲은 눈치없이 날 그 자리에 멈춰 세워 꽤 오랜시간 고개를 떨구지 못하게 했다. 잠시 까먹었던 것 같다. 내가 지금 여기에서 밭담 골목을 산책로 삼아 거닐고 있었던 이유를.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억울했다. 마음이 너무 힘들어 떨궜던 고개가 쉽게 다시 올려진 걸 본 이 동네가 혹시라도 나의 마음을 쉬이 여길까 걱정이 됐다. 저들의 마음은 모르겠지만 난 쉬이 여길 생각이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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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그렇게 다 쉽겠어. 다 어렵지. 어려운데도 그냥 참고, 다들 버티면서 그냥 그렇게 하는거야. 이제 어린 나이 아니다. 성인 되고 10년 동안 정신 안 차리고 살았으면 충분하지 않아? 이젠 좀 차려야지.”


“그래서 정신 차리러 가잖아.”


“그게 정신 차리려고 가는거야? 도망가는거지.”


“……”


“이제 위로하는 것도 지친다고.”


난 한 번도 위로를 바랐던 적은 없다. 하지만 남자친구는 위로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바라지 않았지만 할 수밖에 없었던, 받을 수밖에 없었던 그 수많은 시간은 서로에게 힘이 되기보다 서로를 지치게 했나보다. 제주로 오기 전, 난 결국 나의 비참함을 견디지 못해 이별을 고했다. 남자친구에게는 서로 할 수밖에 없었던, 받을 수밖에 없었던 그것들을 그만하자 이야기했지만, 사실 그 비참함은 나로 인해 비롯되었다는 걸 인정한거나 다름없었다. 회사의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직원들의 처우는 더 안 좋아졌고,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일은 아주 더 먼 일이 되어버린 지금, 난 좋아하는 일보다 생계를 먼저 생각해야하는 현실적인 문제를 마주해야 했다. 전공을 바꿔 아예 다른 직장으로 이직하는 것도 너무 막막했고, 무작정 아무런 자격증이라도 취득하려 여러 정보를 훑어보니 어지럽게 방황만 더 하게 되었다. 그 기나긴 어둠 속에서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게 된 건 이 제주에서였다.


그저 멍하니 한참동안 그 좁은 골목에 가만히 서서 밭담을 바라봤다. 흐릿했던 시야가 잠시 맑아지고 입가에 힘을 주어 광대가 올라가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기들끼리 울타리 안에 모여 돌담 밖에 서있는 나를 이방인으로 만드는 저 자들이 왠지 모르게 날 오히려 편안하게 만들었다. 난 이방인이 맞았고, 그저 낯선 이 곳을 거니는 사람일 뿐이었다. 내가 제주도민이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그냥 머릿속으로 인정해버리자 내 마음엔 평온함이 밀려들어왔다.


제주는 나의 고통을 절대 쉬이 여기지 않았다. 그저 내가 이방인이고, 낯선 이 곳에 멍하니 서 있는 것이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고, 고독을 느끼는 것이 당연한 거라고 알려주었다.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그 수많은 고독은 날 꽤나 많은 것들로부터 더욱 고립시키고 고개를 들지 못하게 만들었지만, 여기서는 오히려 그 고독이 날 편안하게 만들었다. 난 가만히 멈춰있던 발을 다시 앞으로 디뎠다. 불규칙하게 정렬되어 있는 돌담을 따라 계속 거닐다 끝이 보이자 난 숙소로 돌아가려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숙소에 거의 다 도착할 때쯤 저 앞에 나와 같이 잠옷 바지 차림으로 걷고 있는 젊은 사람이 보였다. 그 사람의 걸음은 한없이 느려 나의 크지 않은 보폭이 금세 그를 따라잡았다.


“혹시 어디 가세요?”


내가 물었다. 그는 귀에 꽂았던 에어팟 하나를 빼며 나를 쳐다봤다. 나는 내가 왔던 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에 밭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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